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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호, 김자옥, 김태욱 아나운서의 삼각관계가 뒷이야기! 최백호씨 가슴아픈 인생사..특히 아버지와의 인연은 너무 가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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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niepannuzzo 2023. 6. 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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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로 많은 하모니를 가진 가수 최백호 씨는 낭만적인 가격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오히려 한이 많았습니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생후 5개월 때, 당시 아들을 보러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그의 아버지인 최원봉 씨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교통사고는 자기 아들을 잡아먹은 자식이라 생각한 친할아버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생활이 어려운 그의 가족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최백호 씨는 어머니와 위로 누나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친가 쪽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살아왔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당시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녀가 어디로 가면 그의 생활도 언제든지 바뀌었습니다. 전학이 잦았고, 아버지가 없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무 위에 올라가 습작하던 습관이 자신이 스스로 노래를 만들게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도 재능을 보였습니다. 학창시절 꿈은 영화 감독이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누나 둘이 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어머니의 수입으로는 막내까지 대학에 보낼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그에게 "1년만 있다가 대학에 가면 좋겠다"고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에서 혼자 그림 공부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는 과거에 엄청나게 박했던 교사 월급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생활하기가 버거웠습니다. 어머니께서 부산에서 상업을 시작하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는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최백호 님은 1970년 20살 때 재수를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20대에 남편을 잃고, 청산 과부가 되어 삼남매를 홀로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48살에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후, 최백호 님은 먹고 살기 어려워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반년만에 결핵에 걸려 군에서 의가사 제대하게 됩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 결핵은 사망성과 같은 중병이었습니다. 최백호 님은 경남 동래군 일광해수욕장 인근에서 가장 싼 방을 구해서 혼자서 요양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후, 월세를 낼 돈마저 떨어지자 산속에 들어가서 오두막을 지어서 기거하게 됩니다.

최백호 님은 당시를 "중국 기타 하나 들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2년간 지독하기도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기타치고 노래 부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습작하면서 음악에 집중했습니다."라고 기억합니다. 최백호 님의 노래에는 쓸쓸함과 고독이 짙게 묻어나는데, 이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최백호 님은 우연히 부산 한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친구의 매형이 라이브 클럽을 운영하면서 노래할 가수를 찾던 중, 손님이 드문 시간 때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입소문이 났고, 서울의 쉘부르 출신 가수들이 내려와 노래하던 대형 라이브 클럽으로 스카웃되었습니다. 최백호 님의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짙은 음색은 사람들을 당장 매료시켰습니다. 돈이 어려울 때는 절망적이었지만,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순간 돈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노래하면서 좋다, 즐겁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최백호 님은 노래를 하면서 더 많은 기회와 돈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프다는 생각만 떠오르던 최백호씨는 먹고 살기 위해 통기타 가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 하수영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서랍을 레코드에 소개해 주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기타를 연습하며 곡도 몇 개 만들어 첫 앨범부터 자작곡을 담았습니다. 서랍을 레코드와 5년 전속 계약을 한 그는 1977년 1집 '내 마음 갈 곳을 일어'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듣고 사람들은 연인과의 이별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만든 거라고 합니다. 평생을 고생하신 어머니가 기뻐하실 만한 가을 10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어서 쓴 사모곡으로 MBC에서 신인상을 받았으며, 이병전씨 등이 히트하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수익을 배분 받지 못해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앨범은 물론이고 지방 공연 수입조차 안 주어 하숙집에서 월세를 못 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때, 지구 레코드에서 900만원의 스카웃 제안을 받았지만, 당시 반포 아파트 21평이 1200만원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야심차게 지구 레코드로 옮긴 그는 1979년 3집 '영일만 친구'를 내고 다시 대대적인 히트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로 뜨기 전까지 무려 15년이라는 긴 슬럼프에 빠지게 됩니다. 완전히 잊혀진 가수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가수도 아니었습니다. 야심차게 내놓은 앨범이 시장에서 실패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이후에도

 


그러던 와중 만난 사람 중 한 명은 당시 최고의 여배우였던 김자옥씨였습니다. 최백호씨는 이때 아직 앞으로의 미래가 불투명한 신인급 가수였습니다. 김자옥 씨는 낭만주의자로 알려졌으며, 1980년 사랑에 빠져 결혼합니다. 하지만 3년 만에 이혼한 사실입니다. 김자옥 씨와의 이혼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를 은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1년 만에 다시 나와 활동을 시작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이 당시 나온 노래 '고독'은 최백호 씨가 작사하고 김자옥 씨가 불렀습니다. 이후 두 사람 모두 각자 다른 상대방과 재혼합니다. 김자옥 씨가 두 번째로 결혼한 상대는 오승근 씨의 부인인 손소인 씨로, 재혼할 당시 콘트라베이스 전공 학생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갓집에서 반대가 심해서 결혼식에 장인어른이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였으며, 씨의 본가는 미국에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최백호 씨는 두 번째 결혼 이후에도 힘들었습니다. 돈을 거의 벌지 못해 술집에서 노래하는 일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한인방송국 라디오 DJ로 활동했으나, 방송국이 문을 닫게 되고 삶이 불안정해지자 1992년 귀국했습니다. 그 이후 1994년에 노래로 활동을 다시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드라마 작가 김수현 씨가 우연히 차를 타고 이 노래를 듣게 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장용 씨가 흥얼거리면서 알려졌으며, 1년 반 가량 후에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동료나 후배들에게 곡을 선물하거나 아이유와 듀엣도 해봤습니다. 내가 가수로 활동하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묻는다면, 부모의 영혼이 내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물려받은 DNA도 있지만 그 외에도 뭔가 작용하는 게 느껴져. 가끔은 악상인의 영감도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살아계신 동안 28살에 국회의원이 되셨고, 아버지는 귀걸이를 장식했었는데, 어릴 적에 그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내게는 그 얘기들이 마치 신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는 머리맡에는…

아빠는 이미 떠나셨지만 언제나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마에 대한 그의 사랑은 노래로 표현되었습니다. 최백호 씨는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그가 10원도 벌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가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줬습니다. 그때,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래도, 아내가 있어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낼 수 있었고, 아내와 음악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다는 걸 말했습니다. 최백호 씨는 재산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는 힘들게 살았지만, 이제는 돈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게 합니다. 작사, 작곡, 노래까지 다 할 수 있어서, 저작권료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저작권료를 많이 받는다며, 어떤 면에서는 아무런 노력 없이 얻는 돈이라는 생각에 항상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SBS 러브 fm에서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최백호의 '낭만시대'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낭만시대'에 이어 방송되는 기분 좋은 밤의 DJ는 김자옥 씨의 막내 동생, 그의 전 막내 처남 김태욱 아나운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태욱 씨도 고인이 되었습니다. 가수 김호중 씨가 자신의 롤 모델이 최백호씨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최백호 씨는 이른 나이에 목 상태가 최고점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젊을 때보다 폐활량이 더 커졌다는 것을 발표 당시보다 두세 끼 높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경악했습니다. 2019년 건강이 너무 나빠져, 세상을 하차할 정도로 많이 아프고 몸무게가 무려 10kg나 빠졌다고 합니다. 전국 투어 도중 쓰러지기도 했는데도, 보컬은 최고점인 상태입니다. 요즘 예술가라는 말로도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최백호 씨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좋은 음악을 많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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