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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배우 변희봉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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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niepannuzzo 2023. 6. 2.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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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 배우 변희봉의 이야기에 앞서, 중국 북송시대에 한 학자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메아시들고 나니 해당한 새빨갛게 물이 들었네. 들장미 피곤하면 꽃 다 피는가" 하였더니 찔레꽃 가닥가닥 담장을 넘어오네. 다시 돌아와 시처럼, 꽃들은 앞다퉈 한번에 피지 않으며, 그리고 늦게 핀다고 추한 곳도 없습니다. 오히려 천천히 피어날수록 생명력이 긴 경우도 있지요. 인생이란 꽃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 모두 다 피워버린 꽃보다, 바람도 맞고 햇살도 맞으며, 천천히 열리는 꽃이 저는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배우 변희봉 역시, 사람은 누구나 때가 있고 어느 정도 기다림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지만, 유독 그에게 기다림이 길어 한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더하면 추접스러워 그만하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70이 넘은 나이에 레드카펫에서 밟으며, 자신의 인생을 두고 구멍 나무에 꽃이 피어난 것 같습니다. 변희봉씨가 고백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1942년, 그의 어머니는 6년간의 절에서의 수고 끝에 막내아들인 변희봉씨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조보아 부친이 고향에서 면장을 지내며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집에서 결정될 정도로 좋은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성인이 된 후, 친척의 소개로 한 제약회사에 다니며 숙직실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숙직실에서 라디오 연속극을 듣다가 라디오 관련 일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 그쪽 길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성우 학원이 있다는 걸 알고 부품 꿈을 안고 성우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좀 달랐습니다. 전라도 출신인 글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너는 사투리가 심해서 성우가 될 수 없다"라며 포기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성우가 너무 하고 싶었던 그는, 사를 고치기 위해 당시 전라도 사람들은 일체 만나지 않았지만..

 

(텍스트가 끝나는 지점이 없어서 이어져 있어서 표현이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표준어 방송만 듣고 책을 읽어도 표준어를 생각하며 읽는 등 많은 노력을 했고, 그 결과로 1965년 MBC 공채 성우 2기로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변희봉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웠습니다.

 

막내아들로서 딴따라라 불리며 천시 받던 방송국리를 한다고 하자 난리도 아니었고, 아버지께서는 유언으로 서울 가지 말라고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지난 세월 후회는 없습니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좀 아쉬운 점이 있지만, 그는 제약회사 다닐 때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서울까지 한 번 와주시기도 하셨고 돈도 좀 주셨는데, 미친 듯이 부채를 갚아나가다 보니 돈이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결국 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시면서 용돈을 드려야 하는데, 좀 드리고 싶지만…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면 무거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런데 그때의 감정은 간단하죠.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 생각으로는 배울 수 없을 정도로 어릴 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6살 많은 형님이랑 같이 상가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형님이 친구들과 만나다가 "변희봉씨가 여기 왜 있냐"고 물어봤더니, 형님이 내 동생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가족으로서 부끄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는 집안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성우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성우 월급은 너무 작아서, 굉장히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 고향에서는 나름 밥은 먹고 사는 집에 자식이었는데, 성공한 척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하숙비조차 내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결국, 그는 이러한 괴로움으로 밤마다 외상으로 술만 마셔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술 값이 올랐다. 비용 때문에 집에 돌아갈 여유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나는 "돈이나 땅이 많은 부잣집 여자랑 결혼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내 Jalla와 그녀의 중매인을 만났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둘은 결국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아버지는 담배 회사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아내를 서울로 보낼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받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결혼식 전날 돈이 없어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술에 취해 결혼식을 치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국 미혼남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나는 돈이 없어서 돈도 있고 땅도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때 오빠가 지금의 아내를 소개시켜줬어요. 결혼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를 은밀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난 방법입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부인을 만나보니 기대와는 다른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강조해서 결혼식을 올리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마누라 되는 사람이 내게 "혹시 돈이 얼마나 있어?"라고 물었더니 겨우 17,000원만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나가서 일하게 되어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유부남이 된 후에 라디오 성우로 일하다가 TV로 옮겨왔습니다. 그러나 첫 역할부터 노력을 해야 했고, 그 이후로는 수사반장에서 범죄자를 잡아내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이 일은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었는데, 그래도 어디서든 일하려는 열정으로 버텨냈습니다. 어느 날 6학년 학생들이 아빠의 직업을 놀리는 바람에, "우리 아빠가 애들 먹고 살린다"고 울며 들어왔을 때, 그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애들의 생활기록부에 아버지의 직업을 쓸 때마다, 방송국이라고만 적었는데, 구체적으로 적으라고 하면 제작부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일들이 본인에게도 불만이었는지, 한번은 방송국 부장한테 악역만 연기하는 것에 대한 항의를 했다가 입에 담지 못할 욕만 듣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고, 그만큼 서러움도 많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얼마나 갈시를 받고 살았던지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버리지 않았고, 역할이 점점 좋아져 이완용의 인력공꾼 역할을 하다가 이완용 역할을 하고 흥선대원군의 머슴 연기를 하다가, 마침내 누구에게든 자신이 하는 일을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이 되게 됩니다. 1980년대에는 조선 500년에서 유자강이라는 역할을 맡아 "이 손에 있소이다"라는 대사를 유행시키며 감기약 광고까지 찍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며, 이때부터 살림이 피어, 당시 갈현동에 마음에 드는 집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배우들처럼 많은 돈을 벌진 못했지만요. 그 이후로는 밤업소에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가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면 한 달에 집안체를 살 수 있다고 꼬셨지만, 그는 업소 출연을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가 고백한 대로, 당시 반무대 쪽에 서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기자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눈앞의 거액보다 명예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때 잘 나가던 동료 배우들이 업소 출연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촬영에 치안채 술병까지 갖고 온 것을 보고, 그의 정이 뚝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거절을 하다가 나중에는 위협도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업소가 다 그런 주먹이랑 연결이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언젠가는 미국에서 동포 상대로 위문 공연을 하게 되었고, 이선희, 심형래 등 유명한 연예인들도 위문 공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유자간 캐릭터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멤버의 일원으로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것들을 할 때보다 연기를 하기를 더 좋아하지 않아서 미국 공연을 가기를 매우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에 조건을 제시하여, 미국에서 공연을 하더라도 술집에서는 절대로 공연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장소는 그가 꺼려했던 워싱턴 술집이었고, 심지어 그는 공연 벽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벽보에는 유자강 미국 땡땡클럽에 오다라는 것까지 붙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마지막 공연은 하지 않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고집 때문인지 점차 일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1996년 그는 무려 1년 동안 아무 일도 못하게 되자 결국 또 다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할 일이 너무 없다 보니, 산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눈을 떠보면 주섬주섬 옷을 입고 뒷산에 올라가 경사진 곳을 단숨에 오르고, 숨이 차기 시작하면 그나마 괴로운 것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아침을 먹고 산에 가고, 점심을 먹고 또 가다보니, 그것을 달력에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표시를 해봤었는데, 어느 날 친구들이 방문해 달력을 보니 "와 이렇게 많이 일을 하고 있구나. 매일 표시를 해놨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제 상황을 얘기하면서 고백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하나도 일이 없어서 참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첫째로, 집 빌리는 것도 미안해서 못하겠다 생각했었는데, 어느 정도 절약하면 살 수 있는 금액으로 빌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결국 빚이 점점 커졌죠. 그 때쯤에는 산에 오르기 시작했었는데, 아침에 올라가서 11시 반에 내려와 목욕탕에서 한잔하고 자는 일상을 계속 하다 보니, 결국 지금처럼 다리가 아파지게 되었죠. 더군다나 IMF가 닥친 이후 방송사들이 솔선수범을 보여줘야 한다며, 덜 받는 배우부터 출연료를 깎으라고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출연료를 많이 받았던 그는 그런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 내게 사례를 준 적이 있나요? 왜 그런 얘기를 꺼내나요?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준 적도, 편안하게 밥 먹게 해준 적도 없고, 관계도 없는 사람이 무슨 소리냐"라며 비난하더니 전화를 끊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례를 깎아가며 뭐가 되겠나. 다 하면 추접스러울 뿐이니 애들도 다 컸으니까 그만두자"고 말한 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와 관련해 "우리 시절에는 배우 딴따라 였다. 업신여김을 당했고, 정말 그런 일들이 더러더러 있었다. 나는 시골 사람이기 때문에 특히 아버지께서 내가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정말 싫어하셨다. 그 말씀을 거역하며 맹세한 것은, 소리 없는 조용한 배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내가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때문인지 자존심이 강하다는 나쁜 소리도 들었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이번 일로 좋지 않은 기억만 갖고 있습니다. 연기의 인생을 끝내기로 결심한 어느 날, 한 젊은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자신이 봉준호 감독이라고 말하고, 자신의 새 영화 '플란다스에게란'에서 나를 배역으로 캐스팅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미 방송계와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여전히 저를 출연에 재촉했고, 결국 마침내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가 과거에 출연했던 작품들을 차례로 깨물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가 미안한 마음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조금은 민망한 역할이었지만, 어찌어찌해서 다 찍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개봉 이후에는 그 영화를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몇 일 후, 봉준호 감독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서 "오늘 꼭 같이 영화를 보자"고 하자,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어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영화관에 들어가게 됐어요. 이때, 봉준호 감독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민망한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뭐라고 할까하는 생각에 얼굴이 붉게 올라와 멘붕에 빠졌답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니, 생각보다 괜찮았고,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있어서, 아이 감독 보통 머리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후로, 가족들도 가서 다 같이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천재감독 봉준호와의 인연은 이후 새 작품이 나오면서 더욱 커져, 모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어요. 특히, 세 번째 작품인 괴물은 무려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연기 인생 40년 만에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답니다.

 

이처럼 기다림이 길면 열매도 크다는 걸 깨달았고, 그간 지지부진했던 그의 연기 인생이 봉준호 감독을 만나 활짝 피어나게 된 것 같아요. 남들이 편히 쉬어야 할 나이에 그는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 2017년 봉준호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하며 50년 만에 영화인으로 데뷔했다. 결국 변희봉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갖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저도 살면서 어둡고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큰일은 노력 없이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편 변희봉은 최근 몇 년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가 최근 회복했다.

 

췌장암 진단을 받았지만 다행히 조기에 발견해 현재 완치됐다. 건강상의 이유로 봉준호 감독의 명작 '기생충'에 출연하지 못했지만 이후 불참 이유가 밝혀졌다. 췌장암이 조기에 발견되면 오스카상 수상만큼이나 대단한 일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진단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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