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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가수 이용복 이혼 결혼 스토리! 이용복 근황? 사랑에는 장애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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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niepannuzzo 2023. 6. 2.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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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복은 대한민국 최초 시각장애인 가수! 시력 잃은 이유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대한민국 최초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은 시 같은 노랫말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1970년대 많은 사랑을 받았죠.

이용복 노래모음, 이용복 노래는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불려고 있으며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워낙 활동을 안 하신 지 오래라 그런지 저도 사실 이름만 듣고서는 잘 알 수 없었는데요. 노래를 쭉 들어보니, 아 이런 노래들을 부르신 분이구나 하게 되더군요. 70년대의 대표적인 가수, 7080세대의 대표 중 한 명인 이용복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어릴 적에 시력을 잃고 맹인이 된 가수 이용복은 1957년 6월 27일에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70세가 되었고, 18세에 데뷔했으니 데뷔 52년이 되었군요.

 

그는 8살 때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그에게 희망이 되어준 건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1952년에 태어난 세 살 때 마루에서 마당으로 떨어져 왼쪽눈을 실명했고, 일곱 살 때는 썰매를 타다 오른쪽 눈을 찔리는 바람에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기타를 잡은 이용복은 고등학생이던 1970년에 루치오 델라의 '4 De Marzo'라는 노래를 번안한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노래로 단숨에 스타가 됩니다.

이용복은 시력을 잃은 후 서울맹학교에서 안마와 지압, 침술을 배우기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고 좋아하던 음악을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중3 때 상급생과 함께 선인장이라는 의미의 "캑터스" 밴드를 결성, 고등학교 1학년때 열린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첫 무대를 가졌는데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며 밤마다 연습한다고 구박하시던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처음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가수라는 화제성 때문에 스타가 됐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죠. 당시 마침 레이 찰스나 스티비 원더가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다, 청년들 사이에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이 워낙 강하던 1970년대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세대는 잘 알지 못할 그의 많은 히트곡을 들어보면 단순히 그런 '현상'에 기댄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는 1970년에 데뷔 한 뒤, 검은 안경을 낀 시각장애인 가수로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됐다.

한때 1970년대 신중현 사단에서 노래하던 여자가수 김정미에 푹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1970년대에 사이키델릭하면서도 대중적이고도 환상적인 곡과 보컬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요?

 

이용복도 처음에는 남진, 나훈아 등과 197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라는 설명에 아, 그렇구나 하고 노래를 쭉 들어보았는데, 김정미의 남자 카운터파트가 이용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음악이었답니다.

 

 ...........

가수 이용복의 상징은 새까만 선글라스였는데요.

 

그는 시각장애인이였기때문에 까만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왔죠.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라 그런지 이용복씨는 그때의 느낌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 이용복씨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 애뜻하게 떠올리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요.

 

따돌림당해 외톨이가 되면 그가 찾아가곤 했던 친구, 바로 라디오라고 합니다.

 

 라디오가 있었기에 그는 어린 시절이 그렇게 불행하지만은 않았다고 이야기하네요.

 

어린 이용복에게 라디오는 노래하자고 부르는 친구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하도 노래를 잘 따라 부르니까 아버님이 여기저기 자랑을 하셨어요. 천재라구요. 정말 곧잘 따라 부른곤 해서 어른들이 신동이라고 그랬는데... 한번은 아는 누나가 나한테 팝송을 들려주더니 따라 해보라는 거예요. 그건 못하겠더라구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용복은 1980년 2살 연하의 김연희씨와 결혼해 슬하에 쌍둥이 아들인 주원씨와 효원씨를 두고 있습니다. 김연희씨와 인연을 맺은 건 1973년도라고 알려졌는데 두사람은 이용복이 가수 활동이 한창이던 시절, 국제 전화를 자주 하다가 만난 사이라고 합니다.

이용복의 노래 "첫사랑"의 실제 주인공이자, 30년 전 운명처럼 서로에게 이끌려 불꽃처럼 사랑한 아내 김연희씨는 "저는 남편을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편이 오히려 섭섭한 경우도 있을 거예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본인이 하도록 하고, 제가 일거수 일투족 다 도와주지는 않아요"라고 말하며 남편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담담하게 드러냈다고 합니다.

 

이용복이 가는 곳이면 언제나 부인 김연희가 실과 바늘처럼 늘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이용복 김연희 부부는 작은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면서 그들만의 음악 세상을 꾸리고 있습니다. 아내가 작사를 하면 남편 이용복은 노래와 작곡을 하면서 즐거운 여생을 보고 있지요.

이런 것을 보면 사랑에는 장애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장애가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고, 이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복 이혼, 이용복 재혼 루머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이용복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 깊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참 행복한 사람인 게 아이들이 아빠를 창피하게 여겼다면 마음이 굉장히 아팠을 텐데, 우리 아이들은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너무나도 행복하게 잘 자라 줬다>라고 말을 하며 아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

 

어쨌거나 이용복의 노래를 듣고 한국의 1970년대는 악기 실력에 멋지고 독특한 음색의 가수들이 많았고, 서양 것을 흉내를 내도 제대로 내는 뮤지션들의 보고였음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1980년대가 밝아왔습니다. 컬러 TV의 시대가 열렸고, 새로운 군부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용복의 활동이 다소 느닷없이 뜸해진 것이 군부의 입김 때문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본인은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보다는 컬러 TV의 등장으로 PD들이 전보다 기피한다는 인상은 받았답니다. 그렇게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는 것 같았지만, 이용복의 음악적 열정은 그후로도 식지 않았답니다.

 

이용복은 활동이 뜸해지던 시기에 매니지먼트와 갈등도 겪었고 본인 스스로 음악에 시들해지던 시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무대보다는 무대 뒤, 녹음 스튜디오에서 다른 방식으로 음악 활동을 펼치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용복의 성격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1972년 10대가수상 쇼를 했던 시민회관에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이때 자신이 화재의 최초의 목격자란 익살 가득한 농담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장애에 부끄러워하는 성격도 아니고, 가수생활이 지지부진해졌다고 실의에만 빠져 있지도 않았고, 다른 방식으로 음악 활동을 풀어나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용복은 현재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펜션과 카페를 운영 중이라고 합니다. 이용복은 아내 김연희와 함께 낮이면 바다를 거닐고 밤이면 노래를 부르며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하지요.

 

이용복 카페는 유명하고 잘 알려져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 후기를 올리는 등 이용복 카페의 인기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용복에게 아내 김연희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습니다. 이용복의 지금을 만들어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김연희 씨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식조차 올리지 못하고 산 두 사람이지만, 30년 넘게 살면서 김연희 씨가 작사까지 참여한 음반까지 내면서 느긋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용복과 김연희 부부 보면서 어느새 너무도 많이 소비된 7080 감성과는 다른 새로운 감성을 완전충전해보고 싶습니다^^  

 

이용복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아내와 음악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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